구속사적/선교적 관점에서의 십일조이해_ 김성수 목사(목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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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선교적 관점에서의 십일조이해_ 김성수 목사(목양교회)

십일조에 대한 문제는 기독교안에서 양분화 되어있다.
‘십일조를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의 의견이 이미 화두에 올랐다.

십일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요점들이 있다.
첫째는 십일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의 성경적 이해 부재이고, 둘째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왜곡되고 바르지 못한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의 결과로 인한 부정적 결과이다.

본 저자는 십일조의 이해를 ‘해야 한다.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논쟁의 중심에서 어느 한 편을 취하여 방어와 공격적 입장의 태도를 취하거나, 흑백논리의 태도로 가리기보다는 구속사적 관점과 선교적 관점에서 십일조에 대한 근본적 출발과 십일조의 목적 그리고 말라기에서 의미하는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오늘날 십일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인터넷 당당뉴스의 칼럼에 실린 “십일조에 대한 통념을 깨려면” 이란 글이 올라왔다.

참조(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84 )

글쓴이는 서두에 ‘십일조가 신약시대와는 상관이 없다는 점을 더 확실하게 하면서 십일조에 대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로 시작한다.

전제가 십일조가 ‘신약시대와의 무관함’으로 단정한다. 그러면서 십일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십일조로 인하여 대형교회에 돈이 쌓이고, 그 돈으로 교회가 부패하게 되었다는 결과론적인 것을 제시한다. 그것은 말라기서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씀의 왜곡된 횡포였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십일조의 근원을 이스라엘 12지파로 나뉘어 유대사회에 통용된 것이고,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이라는 문자적인 본문을 따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제사장 제도가 없어지면서 레위인들의 역할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연히 십일조의 개념도 사라졌다는 충분치 못한 설명으로 단언하고 있다. 더욱이 지적할 것을 십일조를 사도들이나, 바울과 같은 목회자, 선교사에 초점을 두고 십일조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도들이 십일조가 아닌 교인들로부터 생활비를 조달받았고, 바울은 자비량으로 선교를 했으므로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가 강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신약에서는 십일조에 대해서 강조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고, 십일조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은 것은 분명히 맞다. 그 점에 있어서 현상적으로나 결과적으로 틀리지 않은 지적이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모두 ‘진실’이 될 수 는 없다. 십일조를 드리는 의미가 왜곡되었을 때, 그 왜곡된 의도에 따라 모여진 십일조는 분명 잘못 사용될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가지게 된다. 그 결과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돈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적 결과를 있다고 해서 성경적 재조명 없이 십일조를 부정하는 것은 섭부른 판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이 주장들에 대한 성경 해석학적 이해가 불충분하다.

앞서 제시한바 나는 십일조에 대한 이해를 구속사적/선교적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즉 그 의미는 십일조가 세속적 축복(물질, 건강, 성공)의 통로이거나,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것이거나, 직분을 받기 위한 기본적인 신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는 십일조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주장하는 자들의 지적과 같은 이해를 갖는다.

첫째, 십일조의 시작 - 구속사적 관점

십일조의 시작은 레위기가 아니라 창세기이다.

창세기14:20로부터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사건이다.

그 배경은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러 집에서 훈련한 318명을 데리고 4왕과 5왕들과 전쟁을 벌여 통폐합한 그돌라오멜과 싸워 승리한 후 롯을 데리고 나오는 중에 살렘왕 멜기세덱,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히브리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을 만나게 된다. 그때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그리스도의 살과 피, 구원자를 상징하는 성만찬)를 가지고 나올 때, 대제사장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다. 그리고 멜기세덱이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라고 선언한다. 그때, 아브라함이 그가 전쟁에서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친다.

십일조의 출발을 모세가 율법을 받은 출애굽기나 레위기 이후로 보지 않고, 율법 이전의 아브라함으로부터 본다. 이는 십일조가 율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아브라함의 구속사적인 의미, 신앙 공동체의 calling을 강하게 담고 있다.

둘째, 십일조의 시작 – 선교적 관점

선교적 관점에서 십일조를 생각하려면, 선교의 출발을 어디에서 볼 것인가? 하는 선이해가필요하다.

전통적인 선교의 이해에 있어서 선교의 출발을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오순절 사건 이후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선교의 출발은 창세기 1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열방으로 보내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바울의 선교 여행과 같이 선교적 활동이나, 선교적 사명이 전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교적 관점이 인간의 선교적 포교 활동과 사역적 사명을 모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십일조의 출발을 선교적 관점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갈라디아서에서 나타난 중요한 한 가지 이슈를 예로 들어 볼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갈등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보다 율법의 행위를 우선에 두고자 하는 것에 대해 ‘믿음’의 자리를 정확하게 정리해 준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 것임을 설명하고,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3:17)고 말한다.이와같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십일조는 율법이 생기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린 것이고, 아브라함의 고백을 통해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28:22)하며 십일조를 통한 신앙적 고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십일조가 유대인의 율법인가? 유대인의 종교세인가? 아니면 율법이 있기 430년 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신앙적 고백을 통해 나타난 믿음의 반응인가?

셋째, 십일조가 담고 있는 구속사의 의미

십일조의 시작을 살펴보았다면, 십일조가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에 대해 연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쳤을 때의 Context의 이해가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다짜고짜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올 때 처음 만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아무생각 없이 드렸겠는가?

과연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길래 그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28장에 와서 십일조에 대한 Devotion을 선언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이전에 경험한 두 가지(12장과 13장) 사건의 플롯(plots)을 살펴보아야 한다.

1) 가나안의 출입 그리고 애굽으로의 도피 – 구원의 경험을 통한 믿음의 반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아비 친척 본토를 떠났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인생의 결과로 보았을 때, 그 인생의 모든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때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기근이 든 땅이었다.(12:10)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을 미련없이 버려두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는 애굽에서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넘겨주는 사건을 만난다. 그도 자기가 죽을까 두려워 미리 아내에게 그런 요청을 한다. 애굽에서 도착해서 아브라함은 바로에게 아내를 넘겨주게 된다. 당시 애굽의 왕 바로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가장 막강한 권세와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 그는 메뚜기보다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이 한 것은 자기의 예상대로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넘겨주어 목숨을 유지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고, 바로의 손에서 사라를 건져 주시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가 아브라함을 불러 호통을 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두려워 아브라함을 건들지 못하고, 무사히 사라와 그의 모든 소유와 함께 애굽에서 나올 수있게 된다. (12:18~19)

아브라함이 이후로 하나님에 대한 선험적 인식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구속자! 하나님은 구원자! 하나님의 현현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본토를 떠나야 하는 수동적 자세가 애굽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와 구속적 사건을 통해서 적극적 믿음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

2) 아브라함의 구원에 대한 적극적 믿음의 변화 – 자신의 주권 포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전적 신뢰

아브라함은 다시 가나안 땅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두려움을 가지고 애굽으로 들어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애굽에서 나와 벧엘로 올라가다보니 아브라함 과 롯의 소유가 많이 함께 동거할 수 없는 지경이였고, 아브람과 롯의 하인들의 다툼으로 인해 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아브람과 롯이 의견을 모아서로 헤어지고자 했을 때, 땅을 선택함에 있어서 아브람을 모든 결정의 우선을 조카 롯에게 주는 것을 보게 된다.(13장6~12) 충분히 자신의 권리와 우선순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주는 모습은 애굽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도움심과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3) 구원받은 자에서 구원하는 자로의 여정 – 조카 롯을 구하는 무모한 행동

조카 롯이 선택한 땅은 소알 땅이었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였다. (13장10~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롯은 소돔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가 있는 곳이었다. (13절) 하지만 그 지역에서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왕들이 배반을 하여 전쟁을 하게 된다. 4왕과 5왕이 서로 전쟁을 치루지만 그돌라오멜이 전쟁에 승리하게 되어 소돔의 있는 모든 전리품과 사람들을 포로로 데려 가게 된다.(14:12)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기르고 훈련된 종 318명을 데리고 단까지 쫒아가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의기왕왕한 나라에 들어가 밤에 그들을 쳐부수는 일을 감행한다. (14:14~16)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떻게 갑자기 그가 용감한 용사로 변할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이 그를 두려움이 없는 자로 만들 수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하심을 경험하고, 자신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그를 무모하리 만큼 용감한 자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을 받은 자에서 이제 구원하는 자로 그 행동의 지형이 바뀌고 넓혀진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가 있고 난 후 그가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치루고, 승리하여 돌아오는 가운데 만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오는 멜기세덱에 대한 아브라함의 인식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다.

창세기 기자가 멜기세덱을 표현한 것은 아브라함이 인식한 묘사로 볼 수 있다. 곧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을 본 것이다. 멜기세덱에게 복을 구한다. 그리고 대적을 자신의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노래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멜기세덱을 보며 구원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하고, ‘그 구원의 증표로 자신의 소유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을 본다.

십일조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Context를 기반으로 시작된다. 십일조는 구속사적인 배경과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시작한다.

넷째, 신명기에서 의미하는 십일조의 핵심 – (신명기 사관을 통한 십일조 제도의 목적은 선교적 구원의 활동에 초점)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26:12)레위기에서부터 십일조를 바치는 내용에 대해 6번이 나온다. 레위기에서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칠 것에 관한 내용으로 집중되는데, 신명기에 들어와서는 이 십일조가 어디에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명시된다는 것이다. 신명기에서부터 이어진 십일조의 목적은 신약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명기 사관의 핵심은 “네가 내 율법을 지키면 축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한 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을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논리로 꼼짝달싹 못 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신명기 사관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맺으신 언약을 이스라엘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모든 민족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 열방을 구원하는 민족으로 쓰임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언약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으로부터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으로 (출19:6) 하나님 나라의 제도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역할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정착할 때부터 그들에게 주신 명령은 수입의 십분의 일을 온전히 드려서 그 드린 예물로 레위지파, 고아, 과부, 객이 성읍 안에서 배불리 먹도록 하기 위한 구원의 제도 장치였던 것이다. 고대 근동의 사회에서 이러한 제도는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엄청나게 고등한 법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신명기에는 십일조의 목적이 레위보다 고아와 과부와 객을 위한 내용이 더 많이 나온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등하고 유능한 민족이 아니라, 이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법은 오늘날에까지도 손볼 필요가 없을 만큼 고등한 법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적인 구원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죄로 인해 변질되고 타락한 사회적 구조, 정치적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실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받침으로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도록 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하나님의 축복이자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받침으로써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는 물질적으로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가 본질이 아니라, 십일조를 통해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 안에로 들어와 안식과 구원의 은총을 얻도록 하는 일에 제도적 역할 즉 사회봉사와 사회행동(Social Serve & Social Action)으로서 십일조를 드리도록 이스라엘에게 특권적 임무를 맡기신 것이다.

다섯째, 말리기가 의미하는 십일조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의 특권에 대한 회복)

그러나 한국 교회에는 과거 오랜동안 십일조에 대한 강조를 말리기 3장 10절을 간판 구절로 인용하여 복받는 비결로 연관하여 적용해 왔다. 그것은 신도들의 기복주의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사기극을 강대상에서 펼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보라”(말3:10)

그런데 이 구절이 어떤 배경에서 나오게 된 것인가?“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십일조)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말3:6-7)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내용이다.

‘너희 조상 때부터 내 규례를 지키지 않았는데, 너희는 그러지 말고 내게 돌아와라’ 라고 대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 내용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여기서 말리기 선지자가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언제 그랬나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라고 말라기 선지자가 말하면서, 그것이 바로 “십일조와 봉헌물”이라고 집어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십일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이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온 열방을 구원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정체성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율법과 같이 물질을 드리는 의미로 단순히 해석하기보다는 십일조라는 주제를 성경 전체의 플롯을 보아야 한다. 즉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신명기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받치라고 하신 것에는 약자들을 위한 사회적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한 목적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3장 6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신명기 때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는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말라기에 이르러서 까지 변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나가며>

오늘날에도 십일조를 유대인들의 세금이라든지, 신약에 거의 나오지 않는 본문이기 때문에 십일조 폐지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다. 나름대로의 논리적이지만, 구약의 율법은 폐기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성되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써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이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보내심으로의 부르심에 소명(요20:21)이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개인 구원에 관심은 있어도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 대위임 명령의 소명이 없는 삶이다.

또한 억지스러운 논리로 폐지론을 외치고, 합리화시키는 것은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을 향해 반박하며 외치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말1:6)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말2:17)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말3:13)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여 율례를 주신 것 가운데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물질을 ‘바치고 안 바치고’의 문제가 본질과 핵심이 아니라,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여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기(사42:6;49:6; 행13:47)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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